본문 바로가기
[ 다음블로그 포스팅 ]/푸른비 단상

(詩) 탐욕 예찬

by 푸른비(박준규) 2016. 1. 21.

- 탐욕 예찬

 

 

적막한 집안에

며칠 째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과 낮에는 집을 비워 들을 수 없지만

깊은 밤과 새벽에는

수면을 방해할 만큼의 큰 소리로

욕실의 울림을 타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한 때

저 소리는 너와 내가 세속에 찌든 몸을 씻고 나왔을 때

욕실서 잠시 나다가 그친 상쾌한 소리였지만

며칠 째 초침만큼이나 정확한 주기로 들리는 저 소리는

문득 문득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오늘 새벽엔 꿈을 꾸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욕조를 가득 채운 물속에서

어김없이 너와 나는 깔깔대며 몸을 씻었고

우리 몸에서 벗겨진 탐욕의 각질들은 검은 덩어리로

하얀 비누거품에 엉겨 욕조 안을 떠다니다가

그 탐욕의 때는 어김없이 미끌거리는 안도를 주었다.

아침이 올 무렵 정해진 시간에 자동으로 켜지는 티브이

며칠째 첫 소식은 오늘의 날씨다.

잠결에 들으니 오늘 아침 기온도 영하 몇 도라며

앵커인지 기상캐스터인지가 멘트를 하고

잠이 덜 깨 눈도 뜨지 못한 나는 발밑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 배 밑으로 발들을 쑤셔 넣다가 할큄을 당해 눈을 뜬다.

아... 그제야

밤새, 새벽 내내 공포스럽게 들리던 물소리가

동파방지를 위해 틀어놓은 수돗물 소리란 걸 인지하고

애먼 고양이에게 아침부터 잔소리를 하며 욕실로 간다.

밤새 욕조 안에 고여진 물이

내가 본 탐욕의 때가 없이 너무나 맑고 투명해

잠시 실망 아닌 실망을 한 번 한 후에

깨작깨작 고양이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선다.

 

 

'[ 다음블로그 포스팅 ] > 푸른비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詩) 절름발이의 도시소풍 가던 날  (0) 2016.03.02
(詩) 허무 공상  (0) 2016.01.28
(詩) 마중의 조건  (0) 2016.01.18
(詩) 가을비  (0) 2015.11.14
(詩) 바람향기 바리케이드  (0) 2015.10.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