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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블로그 포스팅 ]/푸른비 단상

(詩) 나무 일기

by 푸른비(박준규) 2011. 8. 30.

- 나무 일기

 

 

나는 수년을 이 자리에 서서

여름이면 주섬주섬 두터운 초록 옷을 입고

가을 깊어질 무렵이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바람은

여름이면 살랑살랑 내 몸을 흔들어

순간의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주지만

겨울이면 꽁꽁 언 내 몸뚱이를

더 단단히 경직시키는 고통을 준다.

 

나무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고행이며, 어쩌면 행복이다.

혹자들은 나무의 곧은 삶을 부러워하지만

나도 때론 순리를 거스르기도 한다.

다만,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을 뿐.

 

비가 많던 이번 여름

개미들도 내 몸에 오르내리는 날이 적었다.

여름 내내, 내 뿌리 주위에 집을 짓고

동화 속에 나오는 부지런한 일꾼 되어

한여름을 보내야했지만 개미들도 올여름을 망쳤다.

 

땅 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가을

9월을 하루 앞 둔 지금

초록으로 물든 내 옷은 갈색으로 물들 준비를 하고

나는 갈색 옷을 거침없이 벗어던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매미새끼 한 마리

며칠 품다 흘러 버린 여름이지만

나는 또 내년 여름을 기다리며

혹한기 속에서

얼음보다 단단한 내 몸의 경직과 싸워야 한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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