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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블로그 포스팅 ]/사는이야기

내 꿈을 펼쳐준 UCC

by 푸른비(박준규) 2007. 3. 29.

부제: 흩어진 홀씨님들을 찾습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어릴 적부터 저는 꿈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께서 몸이 불편한 저에게 편히 앉아 일할 수 있는 약사라는 직업을 원하셨지만 건강문제로 학교 결석하는 날이 많다보니 어머님의 바람은 한 단계 낮추어 힘들이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이발사는 어떨까 하셨으나 수전증(?)이 심한 관계로 또 그 바람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위 두 가지 바람이 어머니께서 제게 바라던 처음이자 마지막 꿈이셨고 그 꿈을 마음에 두고 제가 중3 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 입시고사를 이틀 앞두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제 정신 아닌 상태에서 시험을 치러 간신히 일반 고등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몸이 내 맘대로 되지 않으니 꿈은 많아도 선뜻 시도하기조차 힘이 들더군요. 몸으로 하는 일들은 신체 조건이 안 되어 포기해야 했고 말로 하는 일들은 언어장애로 미리 포기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힘든 환경에서 자랐지만 꿈만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꿈은 많을수록 좋은 것


이제와 생각하면 제 정신연령이 또래 아이들보다 한참 낮았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정말 장난꾸러기의 본연의 모습을 보이며 밝게 지냈지요. 그 후 어머님의 병환이 갑자기 악화돼 초등학교 졸업 후 1년을 쉬면서 어머님과 집에서 지내다가 다음해 중학교를 입학하고 어머님의 점심을 차려드리러 점심시간 까지만 수업을 듣고 조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때까진 친국들 보다 어머니가 더 좋아 기뻐했지요.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올라가면서 어머님도 입원하시게 되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형님께서 서울(대학)서 춘천(병원)을 통학하면서 지내고 저는 가평서 중3 한 학기를 지냈습니다. 그때부터 제게도 꿈이란 게 생기더군요. 그동안 마냥 어머니 품에서만 지냈는데 혼자 지내다 보니 생각이 바뀌어.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갖게 된 꿈이 레코딩 엔지니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음반, 테잎 등이 많이 판매되던 시절이고 개인적으로 복잡해 보이는 이퀄라이져 앞에서 녹음한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 얼마나 멋지게 보이 던지요. 하지만 이 꿈도 오래 가지 않아 접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떨리는 손 때문이었지요. 복잡한 각종 볼륨들을 조절하려면 손놀림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에 미리 겁먹고 포기를 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시작한 고등학교 시절엔 작가라는 일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특히 방송작가를 해보고 싶더군요. 해서 학교 공부보단 라디오프로그램 제작책자나 관련 책자를 사 읽으며 고등학교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고3때 처음으로 우리 학교에 정보처리반이 개설돼 취업을 원하면 신청할 수 있게 변하여 선뜻 그 반을 신청해 버렸습니다. 솔직히 어릴 적부터 공부를 꾸준히 배우질 않고 관심도 많지 않아 취업반으로 옮기며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작가야 컴퓨터 하면서 충분히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를 해 정보처리자격증을 따려 했습니다. 순조롭게 시간으로 흐르고 고등학교를 졸업해 자격증 시험을 치렀는데 필기는 합격하는 반면 실기에서 늘 낙방. 원인은 필기속도가 더딘 이유였지요. 필기야 사지선다형 식이니 간신히 마킹만 하면 되는데 당시 필기시험은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서술하는 식이라 글씨를 쓰는 게 아닌 꾹꾹 눌러 거의 그리다시피 하는 내겐 곤욕이었습니다. 해서 시간초과로 불합격.


그런 와중 동네에 컴퓨터 관련 사무실이 생겨 구경 갔다가 운좋게 취업이 되어 약 7년 정도 일을 하게 됐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었지요. 그러다 아이엠에프 이겨내고 간신히 운영되던 사무실이 문을 닫고 잠시 지역신문사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그토록 쓰고 싶던 글을 쓰게 시작됐지요. 또한 시간상으로도 여유가 있으니 그동안 해고 팠던 작가 일이 생각나 당시 글 쓰는 모임을 인터넷 상에 만들어 운영하다가 자체 음악방송을 만들어보려 생각을 했습니다.


내 꿈을 펼쳐준 UCC


늘 말하지만 UCC는 최근에 와서 생긴 단어이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자들이 만든 콘텐츠는 존재했습니다. 2001년 당시 인터넷이 보급화 되면서 개인이 하는 인터넷음악방송이 한창 유행할 때입니다. 방송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겐 정말 욕심나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어장애로 음악방송을 해도 목소리는 내보낼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었지요. 그래서 6개월 정도 매일밤 BGM을 타이틀로 하여 음악만 내보내는 방송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머리가 많이 길었었기에 닉네임도 ‘머리긴남자’. 우리 모임에선 머리긴남작이라고도 불렀지요.


그렇게 홀로 방송을 하는 것을 들은 우리 글 쓰는 모임 회원님 한 분(다정님)이 제게 먼저 물어 오시더군요. 본인의 목소리로 원고와 신청곡 말로 전할 테니 같이 방송하면 어떻겠냐고? 너무나 고마운 배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고마운 배려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약 6개월 정도 더 음악방송을 진행했었습니다. 지금도 많이들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 이후 듣질 않다보니 잘 모르겠고 며칠 전 컴퓨터 정리 하나 당시 파일로 저장해 놓은 파일이 있어 듣다가 이렇게 한 번 올려 봅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시 원고를 쓰고 선곡을 하고 나름 색깔 있는 방송으로 꾸며보겠단 의지가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너무나 즐겁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에 목이 멜 정도입니다. 그때 우리 글 쓰는 모임 이름이 ‘홀씨회’. 지금은 그 이름처럼 홀씨 되어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지만 다시 한 번 모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따름입니다.


비록, 내 방송작가의 꿈이 이루어져 그길로 걷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이란 매체와 너무나 마음씨 고운 회원님의 배려로 잠시 동안의 기쁨이 이토록 살아가는데 있어 활력소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 평생 있지 못할 추억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발달된 UCC, 나아가 PCC는 나와 같은 이들에겐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만들어 줄 최상의 조건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젠 장애인들도 사회 속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 한결 쉬워졌으므로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나갈 준비만 열심히 하면 될 것입니다.


어디선가 이글을 읽고 있을지 모르는 우리 '홀씨회‘ 님들께 2001년 03월 15일 방송된 음악방송 1회분(1시간)을 제 블로그에 올려 놓았습니다. 또한 처음 접하는 님들도 다소 서툴고 음질도 안 좋지만 잔잔한 시와 다양한 음악이 있는 방송 들어보시며 편한 시간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제 블로그에서 방송을 들으시는 님들은 블로그 배경음악부터 정시시키시고 들어주세요^^)



▲ 위방송은 인터넷 방송을 테이프에 녹음했다가 다시 .wma  파일로 변환했기에

음질이 떨어지며 소리가 작으니 볼륨을 키워 들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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