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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블로그 포스팅 ]/푸른비 단상

(단상) 그리워할 수 있는 자유

by 푸른비(박준규) 2008. 1. 21.

- 그리워할 수 있는 자유

 

 

언제부터일까?

내겐 그리워하는 것에도 참 많은 제한이 붙게 됐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임의적으로 그어 놓은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편했다. 자격지심으로 그어 놓은 선이던 정말 현실이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랬을 것이던 내 그리움을 쉽게 누군가에게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해 있다.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는 것은 그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부담이라는 의미가 어떤 것이던 상관없다. 사람은 누군가 자기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면 설렘과 동시에 아주 작은 감정이라도 부담을 본인도 모르게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알기에 나는 섣불리 내 그리움의 감정을 상대에게 드러낼 수가 없다. 그러면서 나는 그리움을 감추면 병(病)이 됨을 깨달았다. 적어도 자기 자신이 단순세포 인간이 아니라면 그리움을 싸안고 지내다가 그것이 차츰차츰 썩게 되면 마음의 병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리움을 표현하라고, 자신 있게 말하라고.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적어도 그리움은 내겐 그런 존재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많아짐은 당연한 자연의 순리이기 때문에 나는 이를 내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시절엔 철이 없어 그리움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해 그냥 지나친 경우가 많았고 이제와 그리움이란 것이 눈에 마음에 들어오는데 지금은 내 가슴보다 머리가 먼저 나를 제어하고 있다. ‘네(내) 그리움의 표현은 상대를 힘들게 할 것이다’고 내 머리가 내 가슴에게 제약을 한다. 이런 나를 보면서 이성적(理性的) 판단이 감성적 판단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썩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알게 돼 버렸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워할 수 있는 아니, 그립다고 표현할 수 있는 용기가 갖고 싶어진다. 거침없이 다가가서 당당히 마음을 드러내 보이며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갖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도 잠시, 현실에 길들어진 나는 이내 소극적 생(生)에 연연해하며 ‘이럴 때 누군가 먼저 용기 내어 다가와 주면 안 되는 것인지’라고 부질없는 바람을 꿈꿔본다. 참 허망한 바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는 내 자신보다는 그리워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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