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 학대에서 얻는 행복
낡은 시집을 펼쳐 본다.
그렇다고 이 시집 안에 있는 시들을 모두 읽지는 않는다.
그냥 낡은 표지가 좋고 간혹 마음을 잡는 싯귀 하나에 족할 뿐.
이 책은 몇 편 되지도 않는 시들을 담고 있지만
나는 몇 년째 이 시들을 모두 읽지 않았다.
어찌 보면 내 게으름이며
이 시들을 쓴 시인에게도 미안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몇 년 동안 아니, 이십여 년 넘게
이 시집을 손닿는 곳에 두고 기억에서 잊지는 않았다.
이제는 종잇장도 누렇게 변해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쩍쩍 제본이 뜯어져
시들은 책속에서 분리된 지 오래고
어느 날은 책을 놓쳐 떨어뜨리는 순간
바닥으로 여러 장의 시들이 뒤엉켜 버렸다.
때문에
지금 이 낡은 시집 속에는 목차와 관계없이
몇 편의 시들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지만
게으른 나는
그 엉킨 시들을 풀어놓지 않았다.
오늘이 가고 또 훗날
이 낡은 시집을 펼쳐볼 때
나는 화가 날 지도 모른다.
불협화음을 내는 시들에 화가 나고
그렇게 만든 나에게 화가 나고
그래도 오늘은
흰 표지가 누렇게 변하고
쩍쩍 제본이 뜯어져 시들이 섞여버린
이 낡은 시집이 앞에 있어 좋다.
이십여 년 지나도 다 못 읽은 시집 한 권.
'[ 다음블로그 포스팅 ] > 푸른비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詩) 침묵의 계절 #F (0) | 2012.01.18 |
---|---|
(詩) 물방울 인연 (0) | 2012.01.17 |
(詩) 기억창고 안에 이름 (0) | 2012.01.13 |
(詩) 세상에 물들기 (0) | 2012.01.12 |
(詩) 선택의 시 (0) | 2012.01.11 |
댓글